
유난히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9월의 추석이었다. 나에게는 세상을 보는 눈을 틔워주었던 인생의 멘토이자,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깊이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기도 했다.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1년 중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를 찾아뵐 일을 만드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그리운 마음을 품고 친정집으로 향하는 길, 창밖에 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아득했던 17년 전의 그날이 다시금 떠올랐다.
1. 준비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 이별, 그리고 17년 전 그 새벽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느덧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당시 막내 여동생의 결혼식을 불과 한 달 남겨두었던 시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셔서 급히 병원으로 가셨는데,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다음 날 곧바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역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어 대구의 대학병원으로 급히 이송되던 위급한 상황이었다. 천안에 있던 동생도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해 일하다 말고 내려왔다. 당시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큰 병원에 갔으니 괜찮아지실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경주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중 밤 12시가 넘어가자 이유 모를 불길함과 함께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남편에게 대구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동생에게서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누나한테는 너무 놀라지 않게 말하고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올라와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새벽 어둠을 뚫고 대구로 향하던 차 안에서 나는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와 언니, 남동생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던 여동생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도착했다. 당시 여동생의 뱃속에 있던 조카가 벌써 자라 올해 17살이 되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발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빠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였고, 정말 사랑합니다."
2. 13구의 묘지와 아버지가 남긴 홀로 된 삶의 무게
아버지는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그 어떤 경제적 부담도 남기지 않으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병원비조차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흔적은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짓는 대신, 그 조건으로 해주기로 약속했던 벌초 작업의 마무리였다. 생전에 남동생과 내가 아버지를 따라다녀 본 적이 있었기에 묘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무려 13구에 달하는 타인의 묘지를 남동생과 둘이서 벌초하며, 나는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짊어지고 살았던 삶의 무게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잡풀을 베어내며 마음 한구석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가난이라는 것이, 그리고 아무 내색 없이 이 많은 짐을 혼자 짊어져야 했던 삶이 참으로 원망스럽고 서글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자식들에게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 무거운 짐을 혼자 안은 채 얼마나 외롭고 외로우셨을까.
3. 도서 《나의 완벽한 장례식》 줄거리와 작가의 메시지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최근 책 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조현선 작가의 소설 《나의 완벽한 장례식》이 떠올랐다. 죽음과 이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이 책의 핵심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줄거리 2줄 요약: 종합병원 장례식장 옆 매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이 이승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을 만나, 그들이 생전에 다 전하지 못한 소원과 가족을 향한 안타까운 진심을 대신 전해주며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다.
-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붙잡고 있던 한 가지 기억을 품고 떠난다고 한다. 결국 완벽한 장례식이라는 것은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는 이들에게 진심을 전하고 후회와 빚을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책 속 영혼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금 헤아려 보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그 어떤 빚도, 짐도 남겨주고 싶지 않으셨던 그 깊은 사랑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4. 50대에 접어들며 깨닫는 가족의 소중함과 삶의 태도
아이 셋을 키우며 살아가는 요즘, 나는 문득문득 아버지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오십이라는 나이에 들어서니 죽음이라는 명제가 더 이상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의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는 역시나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홀로 남으신 어머니, 즉 '가족'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50대라는 나이는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다가올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죽음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동년배들에게 이 책 《나의 완벽한 장례식》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단순히 죽음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오늘 하루 곁에 있는 가족을 얼마나 더 사랑하고 표현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루어 두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을 오늘 당장 건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미련을 남기지 않는 가장 완벽한 준비가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