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시간을 ‘흐르는 것’이라 생각이라 하지만 『히어(Here)』는 그 관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 책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겹쳐지는 시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리처드 맥과이어의 『히어』는 단 한 장소, 즉 거실의 한 모퉁이를 배경으로 수만 년의 역사를 오가며. 같은 공간이지만, 그 안을 채우는 사람과 사건, 감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이 단순한 설정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심오한 철학을 만들어내었다.
시간의 시각화 – 한 공간 속의 모든 순간

『히어』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서사적 긴장도 없다.
대신 작가는 공간 자체를 주인공으로 정했다. 책의 모든 장면은 같은 위치에서 바라본 ‘한 방의 모서리’며
. 그 공간 속에서 시대가 바뀌고, 인물이 교체되고, 문명의 변화가 있다. 때로는 1600년대의 원주민이
등장하고, 때로는 1900년대의 가족이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미래에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고, 그 공간에는
아무도 없기도 하다. 이처럼 『히어』는 ‘시간의 겹침’을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드러내려 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앉아 있는 공간에도, 과거의 누군가가 살았고, 미래의 누군가가 있을 것이며. 공간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은 사라졌다. 결국 우리는 모두
‘시간의 손님’으로 잠시 머무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일상, 그리고 시간의 무심함

히어』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거대한 사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죽고, 태어나고, 사랑하고,
싸우지만, 그 모든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조용하다. 그 대신 작가는 시간의 무심함을 보여줬다. 아이의
웃음, 노인의 한숨, 청소하는 손, 그 모든 것들이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한 장면에서 노부인이 소파에 앉아 “내가 여길 처음 왔을 때는…”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면은 1910년으로 넘어가 집이 처음 지어지는 모습이 등장하며 다시 2100년, 그 공간은 허물어져 숲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 순간 독자는 깨닫는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공간은 기억하는구나.”
그렇기에 『히어』는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시간에 대한 묵상이다.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 결국 사라지고, 시간은 아무런 감정 없이 다음 세대를 맞이한다. 그 무심함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존재는 더욱 따뜻하게 빛나게 된다.
내가 그 ‘공간’이라면 – 상상의 상황극
만약 내가 『히어』의 공간, 그 방의 한 모서리라면 어떨까. 나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인간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새들이 날고, 강이 흐르는 대지였다가 어느 날 인간이 찾아와 벽을 세우고, 가구를
들여놓으며.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의 속삭임, 다툼, 이별, 죽음까지 — 그 모든 감정이 나의 마음을
스쳤다가 사라진다. 어떤 날은 전쟁이 일어나고, 어떤 날은 눈부신 햇살 아래 누군가 그림을 그리며.
시간이 지나면서 먼 지가 쌓이고, 가구가 낡아가며, 새로운 세대가 들어와 같은 자리에 다시 앉게 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히어』는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시간의 철학서’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지금’을
사는 것은 찰나이며, 그 찰나 속에도 수많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공간은 말이 없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 갈 것이다.
예술과 철학의 경계에서
『히어』는 그래픽 노블의 형태를 취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예술과 철학의 경계에 선 작품이다. 문장이
거의 없고, 대사보다 이미지가 말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명확한 서사를 느낄 수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경험이 ‘시간’이라는 공통된 언어로 묶여 있기 때문인 것이다.
리처드 맥과이어는 이 작품을 통해 “모든 시간은 지금, 여기(Here)에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동시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불교의 윤회 개념, 또는 현대물리학의 블록 유니버스 이론과도 통한다. 결국 『히어』는 시각적 예술의
형태로 ‘시간의 본질’을 탐구한 실험적이면서도 시적인 작품인 것이다.
결론 – 사라짐 속의 영원함
책을 덮으면 마음이 이상하게 고요해진다. 『히어』에는 슬픔이 있지만, 절망은 없다. 사람은 떠나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점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점이 모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또 다른 생명을 품는다.
『히어』는 말한다. “모든 순간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존재한다.” 이 문장은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누군가의 과거가 되고, 또 다른 미래가 된다는 사실.
그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겸허해진다.
리처드 맥과이어의 『히어』는 시간과 공간, 인간 존재의 의미를 한 화면에 담아낸 가장 조용하고도
위대한 예술 작품인 것이다.